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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9일 목요일

포일로 싸는 전파


이름만 보면 도저히 삼겹살집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여우골’이라는 가계가 있다. 꼭 룸싸롱 같은 이름의 이 식당에서 마치 룸싸롱에 온 것 처럼 술에 취한 손님과 종업원이 큰 소리를 낸 것은 우리가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던 때였다. 종업원이 오더니 주문을 받길래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를 물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저 술취한 손님이 술을 더 시키기 위해 테이블에 있는 벨을 여러 번 눌렀는데 아무도 주문을 받지 않자 자신을 무시하는 줄 알고 화가 나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화풀이를 한 모양이다. 큰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종업원이 벨에 배터리가 다 되었다며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는 있는데 ‘룸싸롱 손님’은 ‘저기에 배터리가 왜 들어가냐’며 성에 차지 않는 듯 아직도 큰소리다. 급기야 주인이 나와서 드라이버로 테이블 벨을 뜯어내 안에 있는 배터리를 보여주자 그때서야 ‘제때 배터리를 갈았어야지...’라며 화를 누그러뜨린다.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을 하나 고르라 하면 너나없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뽑는다. ‘룸싸롱 손님’은 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벨을 누르면 뭔가 나가야 하고 뭔가 나가기 위해서는 에너지원이 필요하다는 간단한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는 미안했는지 주인에게 술 한잔 따르며 자신은 여태껏 벨이 전선과 연결되어 있어 초인종처럼 전선을 타고 신호가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배터리 얘기가 나오자 그렇게 화를 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리어 주인에게 묻는다.
‘버튼을 누르면 이게 어떻게 전달됩니까? 이게 무선인가?’

  사실 나도 매번 누르기만 했지 정확한 원리는 모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도 전달되고 칸막이가 높게 쳐진 방안에서도 전달되는 것으로 봐서 전파를 이용하는 것 같다는 추측만 들 뿐이다. 이참에 테이블 벨 제조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정보를 얻기로 했다. 테이블 벨은 역시 전파를 이용하고 있었으며 예전에 무선호출기(삐삐)가 사용했던 280MHz 안팎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도달거리는 20-30m정도라고 하니 꽤 멀리 간다. 만약 옆집에서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면 옆집 테이블에서 누른 신호가 벽을 넘어 전달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서로 다른 주파수를 사용하고 고유 신호를 주면 혼선을 쉽게 막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또 테이블 마다 번호를 달리하여 전달해야 하므로 전파에 정보를 싣는 변조과정이 필요한데 테이블 벨은 FM방식-라디오의 FM방송과 같은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무선 신호를 보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나도 사실 최근에 이 사실을 알았다. 아주 화창한 봄날 정원이 딸린 식당에 갔었는데 ‘自動, PUSH’라고 쓰여진 버튼을 누르면 열리는 자동문 앞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 버튼을 누르면서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이 봄 날씨만큼이나 정겨웠다. 그러다가 문득 그 버튼을 바라보는데 버튼 주위로 전선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투명한 유리문에 단지 달라붙어있는 상태로 보였는데 그걸 누르면 문이 스르륵 잘도 열렸다. 여태껏 나는 버튼이 전선과 연결되어 있어 누르면 신호가 전달되는 줄 알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간단한 것에도 전파라는 것이 사용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테이블 벨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그 버튼 안에 건전지가 들어있고 전파를 낼 수 있는 송신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신기가 문의 어디쯤 달려있어서 모터로 가는 전원을 가동시켜 문을 여는 것이다. 

  문득 알루미늄 포일이 생각났다. 도체로 둘러싸면 그 안으로 전파가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는 전자기 차폐현상을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알루미늄 포일. 만약 자동문의 스위치를 포일로 감싼다면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전파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번진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번잡하지 않은 곳으로 장소를 정하고, 포일로 잘 감싸고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런 상황을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날 이후 가방에 포일을 잘 싸서 넣고 다녔다.
  몇 주 후 대전역에서 드디어 자동문을 발견했다. KTX로 환승하는 사람들을 위해 플랫폼에 대기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에 자동문이 있었다. 인적도 드물고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최상의 조건이었다. 눈치를 보며 자동문 버튼을 포일로 감싸고 멀찌감치 앉아서 사람을 기다렸다. 환승시간이 15분간 이므로 이 시간 안에 모든 실험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몇 분 지나니 한 꼬마가 문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바로 포일을 벗겨 찢어버리고는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괴씸한 녀석같으니라고. ‘유비무환’. 이런 사태에 대비하여 포일을 한 장 더 가져왔다. 다시 자동문을 감싸고 기다리니 이번엔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열리지 말아야 할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이 아닌가? 아! 사진은 커녕 실험도 실패했다. 다시 해보기에는 남은 시간이 없었다. 환승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실험을 하기로 맘먹은 것은 식당에서 테이블 벨을 발견하고 나서다. 정확히 말하면 ‘룸싸롱 손님’이 버튼을 눌러도 종업원이 안온다고 떼를 쓴 바로 그때다. 사실 생각은 났지만 포일이 없었다. 종업원에게 달라고 하기에는 식당 분위기가 ‘룸싸롱 손님’덕에 극도로 냉각된 상태였다. 결국 주말에 실험을 하기 위해 아내와 외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미리 동네 상점을 물색해 테이블 벨이 설치된 가계를 정해두었다. 이건 아내의 몫이었다. 당첨된 상점은 가까이 있는 보쌈집이었다. 아내는 보쌈집이 반찬도 많고 싸먹는 채소도 다양하기 때문에 먹다 모자를 때 버튼을 여러 번 누를 수 있어서 실험하기 용이하며, 칸막이가 쳐져 있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적극 추천했다. 본인이 보쌈을 먹고 싶어서 선택한 건지 진정으로 남편의 실험을 위해서 선택한 건지 살짝 의심이 가긴 하나 들어보니 꽤 이유 있는 선택인것 같았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보쌈집은 개업한지 얼마 되지 않는 듯 모든 것이 새것이었다. 당연히 테이블 벨도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일단 주문을 하기 위해 벨을 눌렀다. ‘띵동’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전광판에 22번이라고 뜬다. ‘음 22번이 우리 테이블이군’ 잽싸게 젊은 종업원이 와서 메뉴판을 주고 간다. 아무래도 알바인 것 같다.

  주문을 하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포일을 빼내 테이블 벨에 씌웠다. 순간 종업원이 들이닥쳤다. 우리는 갑자기 들이닥친 ‘알바 녀석’에게 실험의 전말을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 녀석은 고기와 채소, 앞 접시를 놓다가 우리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고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짓고 돌아갔다. 우리 둘은 서로 마주보며 녀석의 미소에 대해 고민했다. 무슨 의미인가? 

일단 일차 실험에 들어간다.
‘만약 전파가 나와서 벨이 울리면 뭘 시키지?’
‘사이다 한 병 시키지 뭐’
  긴장 속에 살짝 버튼을 누르자 불행히도 ‘띵동’하면서 벨이 울리고 22번 숫자가 큼지막하게 보인다. 냉큼 달려오는 ‘알바 녀석’에게 떨떠름하게 사이다를 시켰다.
‘왜 벨이 울리지?’
‘뭐가 문제일까?’
전파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포일을 좀 더 펴서 주변까지 가리고 테이블의 아래쪽에도 감쌌다. 자 이제 2차 실험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먹고 하자고 조른다. 역시 이 집을 선택한 건 실험보단 보쌈이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푸짐한 각종 채소에 고기를 싸서 한입 한입 먹다보니 어느덧 상추가 떨어졌다. 이때다. 다시 포일로 벨을 감싼 다음에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띵동’하며 전광판에는 22번이 뜬다. 

  날쌘 ‘알바 녀석’이 상추를 채워주고 갔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왜 전파가 차단되지 않는지 고민했다. 알루미늄 포일 같은 도체로 둘러쌀 경우 도체 안의 전기장이 ‘0’이 되는 것을 전자기 차폐라고 한다. 전파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진동인데 그중 전기장을 차단하는 것으로, 전기장이 차단되면 자기장도 만들어지지 않아 결국 전파는 통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전파의 종류에 따라 차폐의 정도가 결정되는데 파장이 긴 라디오파는 모기장 정도의 철망이면 차폐가 된다고 한다. 테이블 벨이 사용하는 280MHz 안팎의 전파는 라디오 보다 파장이 짧으니 더 빈틈없이 감싸야 한다는 말인데 벨이 부착된 테이블의 구조상 테이블을 통째로 감싸지 않는 한 빈틈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테이블을 모조리 포일로 빈틈없이 감싸는 모양을 상상해 보라. 아무리 싸서 먹는 보쌈집이지만 과연 손님이 할 짓인가? 방법은 간단하다. 부착된 벨을 떼서 벨만 감싸면 된다. 하지만 이게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다. 만약 떼다가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낭패다. 부착된 면을 보니 양면 테잎으로 붙인것 같다. 그렇다면 조금 힘을 준다면 떨어질 것 같기도 하다. 둘이 앉아 밥은 안먹고 테이블 벨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으니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옆 테이블의 한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고장 났으면 저희 테이블꺼 누르세요’
친절한 그 남자는 손수 벨 까지 눌러주었다. 반갑지 않은 ‘띵동’ 소리와 함께 ‘알바 녀석’이 왔다. 다시 사이다를 시켰다. 일단 사이다를 한 컵 들이키고 벨을 보니 붙인지 얼마 되지 않아 들뜬 곳이 보인다. 살짝 밀어보니 ‘쩌억’ 하면서 벨이 떨어졌다. 의외로 쉽게 떨어진다. 재빨리 포일로 빈틈없이 감쌌다. 그리고 벨이 울리면 주문할 동치미 국물을 원샷하고 벨을 눌렀다.

  ‘아!’ 전광판에 숫자가 뜨지 않는다. 성공이다. 여러 번 연달아 눌러도, 아무리 눌러도 저기 ‘알바 녀석’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직접 해보니 ‘룸싸롱 손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포일을 벗겨내고 제자리에 잘 붙였다. 전보다 훨씬 더 잘 붙게 하려고 부착부분에 먼지도 닦고 전보다 더 견고하게 붙여놓았다.  벨을 살짝 눌러 동치미 국물을 시켰다. 그리고 ‘알바 녀석’에게 살며시 미소를 보내주었다. 써비스로 나오는 누룽지 까지 먹고 나서 포만감에 보쌈집을 나섰다.

  늦가을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저 별빛도 방금까지 우리가 애써 실험한 전파의 일종이다. 빛이 전파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처음 밝힌 영국의 물리학자 맥스웰이 학회에 그 사실을 발표하기 전에 그의 연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 저 별빛이 전파의 한 종류라는 것을 아는, 세상에 단 한사람과 같이 있는 기분이 어때?’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 얘기를 하니 대답 대신 ‘꺼억’하면 거하게 트림으로 답해준다. 
그녀에겐 실험의 성공보단 보쌈을 먹은 보람이 더 크리라.